運用美學: The Art Of Operation
첫째는 도道이다. 둘째는 하늘이다. 셋째는 땅이다. 넷째는 장수이다. 다섯째는 법이다.¹
더는 저녁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야심한 시각. 바야흐로 낮 동안의 일과를 맡은 사람들에게 오늘치 일상의 매듭을 짓기 좋은 시간대가 찾아왔다. 인리계속보장기관에 근속하는 인원들이 삼삼오오 자신의 개인실로 향하며 서로에게 잘 자라는 밤 인사를 나눴다. 몇몇은 사무실에서 퇴거 시에 자신 뒤에 올 야간조와 교대하며 그들의 일과의 시작에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스태프실 문간에는 적절한 휴식의 기류에 쉬이 화하지 못한 채 퉁명스러운 언사를 바삐 주고받는 이들도 항상 있었다.
"어이, 카메론. 벌써 다섯 번째 제안이다. 슬슬 쉬러 들어가는 게 어때?"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그놈의 최선! 그래,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좋지.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금 너의 최선은 일이 아니라 휴식일 것 같네!"
뫼니에르는 딱 잘라 말하며 제게 무어라 항변하는 긴 머리의 소년을 얼른 스태프실 바깥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근면하다 못해 일 중독인 스태프 카메론 서머는 이틀을 내리 철야한 끝에 동료의 손에 거의 쫓겨나다시피 떠밀려 여타 주간 근무 스태프들과 같이 반강제적 자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틀이나 밤을 새웠으니 얼른 침대에 누워 밤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카메론은 어쩐 일인지 개인실로 직행하고 싶지 않았다. 반항심이었는지, 치기였는지. 그는 공연히 발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복도를 오가며 마주치는 인원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다 곧 인사치레 같은 건 지루하다고 판단했는지, 무턱대고 사건이 벌어질 만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떠돌던 카메론은 식사 시간대가 아닌 탓에 텅 비어 있는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아무도 없나, 하고 휘 둘러보던 중 그의 시선에 홀로 식사를 하고 있는 왜소한 인영이 들어왔다. 카메론은 호기심이라도 동했는지 사각 테이블 귀퉁이의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식사하던 이는 인기척에 뒤편을 흘금 돌아보았다. 후방을 확인하는 고개의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뺨에 드리운 금발이 살랑였다.
"아, 카메론 경이군요. 무슨 일이라도……."
식사하고 있던 소녀는 다름 아닌 아르토리아였다. 아르토리아는 입안의 잔여물을 얼른 삼킨 후 카메론을 희소로 반겼다. 손에는 반쯤 먹어치운 주먹밥을 하나 들고 있는 채였다.
"이런. 뒤에서 접근한 결례를 용서하세요. 모처럼 자유 시간을 얻었습니다, 폐하."
"괜찮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한가하신 모양이네요."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카메론에게 아르토리아는 정중한 눈짓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종용했다. 아르토리아의 앞에는 여분의 주먹밥이 소담히 쌓여 있었고 그 너머로는 홀로 수 두는 연습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예스러운 목제 체스판이 기물과 함께 깔려 있었다. 카메론의 시선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체스판 위에 꽂혔다. 카메론이 체스판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는 것을 의식한 아르토리아는 주먹밥 더미를 한편으로 밀어 치우며 체스를 두기 좋도록 테이블을 깨끗이 했다. 그 과정에서 주먹밥 하나를 카메론에게 권하였으나 그는 예의 바르게 사양했다. 남은 주먹밥을 한 입에 털어 넣은 아르토리아는 더 이상 오가는 대화 없이 익숙하게 체스판 위의 기물을 하나하나 게임 준비 상태로 정렬하기 시작했다.
기사왕과 무명 기사였던 자가 체스를 두는 제법 막역한 사이가 된 지도 벌써 수개월. 두 사람은 대국 중 절대로 일부러 봐주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맹약을 맺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무명 기사였던 자는 기사왕과 치렀던 여러 번의 게임 가운데 여태껏 단 한 번의 승리조차 거두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여러 번의 대국에서 흑과 백을 바꿔도 보았고, 두는 시간대를 달리해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과는 매한가지로 같았다. 승과 패는 오로지 기물을 움직이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연달아 지기만 함에도 무명 기사였던 자는 항상 먼저 찾아와 다음 승부를, 또 다음 승부를 요구했다. 연패하는 중에도 간혹 기사왕의 킹을 체크까지 몰고 가기도 하면서 눈에 불을 켠 그의 태도에서는 결코 시시하게 일패를 내어 주지만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명 기사였던 자는 지금껏 저의 왕과 했던 한 판 한 판이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종국 후에도 한참을 혼자 남아 기물을 만지작거리며 기보를 복기하고는 했다. 기사왕은 그의 그러한 행동을 고결한 의지로도, 때늦은 치기로도 평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흑과 백, 어느 쪽을 택할지 말씀해 주세요."
아르토리아는 어느새 게임의 세팅을 마치고 카메론 쪽에 고갯짓 했다. 먼저 골라 달라는 요청에 황송하다는 듯 손을 잠시 머뭇거리는 카메론을 향해 그녀는 대답 대신 가벼운 미소를 입에 물었다. 이에 카메론도 장고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난 경기에서 백을 택했으니 이번에는 흑으로 가겠습니다."
"마침 흑의 기물들이 경 쪽에 놓였으니 판을 돌릴 필요 없이 그대로 게임을 시작하면 되겠네요.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인사로 게임의 시작을 알린 후 아르토리아의 손이 순조롭게 f2의 폰을 f4로 밀어 놓았다. 그녀가 움직임을 마치자 카메론은 스스로의 턱을 조금 문질렀다. 그러고는 오래지 않아 e7의 폰을 두 칸 앞으로 밀어 재배치했다. 아직까지는 어떤 형태의 카운터일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음 수에 밝혀지겠거니, 하며 아르토리아는 움직임이 막힌 폰 대신 그 옆의 폰을 전진시켰다. 명확한 킹즈 갬빗이었다. 폰의 두 칸 분량의 진군을 본 카메론의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돌아온 그의 차례에서 그가 손댄 기물은 뜻밖에 퀸이었다.
"체크."
카메론이 나직하게 읊은 한 단어에 아르토리아는 잠시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른 순에 퀸을 대각선으로 전개해 이쪽의 킹에게 체크를 건다니, 보통이라면 잘 택하지 않을 전술이 아닌가. 킨즈 디펜스로 응하는 그를 보며 아르토리아는 속으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급한 경의 성정이 이번엔 이런 식으로 비치는군요."
그녀는 체크 선언에도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의 대담한 시도에는 간단하게 파훼해서 방어할 수 있는 허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토리아는 고민 없이 g3에 폰을 배치했다. 이에 카메론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카메론 경. 이 폰을 제거하실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내가 퀸을 물리는 수밖에요."
"잘 생각했습니다. 차례의 낭비에 대해서 조금 배우셨을까요."
"……."
카메론은 더 말을 잇는 대신 말대로 여왕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의 얼굴에 묘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르토리아는 순조롭게 자신의 기물을 옮겨 공격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카메론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공연히 마음이 급해지고 말았다. 기회를 한 번 잡았다가 놓쳤다고 생각하니 손이 한없이 허전했다.
일개 장졸이 아닌 최종적인 주군의 마음가짐을 목표한다면 병법서의 탐독만이 능사가 아닐진대, 카메론은 여태 남는 시간에 《오륜서》의 구절이나 좀 외었을까. 그는 게임이 무르익을수록 실전적 난관에 봉착해 손을 좀체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왕의 하얀 나이트가 어느새 검은 폰을 하나 뛰어넘어 흑의 킹을 위협했다.
"체크."
"……."
카메론의 낯빛이 소폭 어두워졌다. 마음만 같아서는 나이트를 탈락시켜 마음 편히 위협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진영을 헤집고 뛰어들어온 군마의 위용을 뽐내려는지 백의 나이트는 흑의 비숍의 진로에서도 룩의 진로에서도 교묘하게 비껴나간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굴한 수비 구도의 효시, 카메론에게는 제 왕의 피신 외에는 기실 도리가 없었다. 못내 아쉬운 티가 역력한 채 카메론은 이를 세게 악물며 순흑의 옥체가 말발굽에 차이는 것만을 간신히 면했다. 카메론의 솔직한 낯빛을 보던 아르토리아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카메론은 입술을 달싹이다 체념조로 한 마디 뱉었다.
"폐하. 어째서 체스의 킹은 강하지 못합니까? 공격 전술은 고사하고, 한 칸 움직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군주는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더이까?"
"그렇습니다. 멀리 달아날 수도, 과감하게 진격할 수도 없이 다른 기물에 의존할 뿐이죠. 어째서, 라고 물으셨나요."
본론의 발화에 앞서 아르토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며 왕으로서 군림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날이 제 뇌리를 스치도록 두었다. 무너져 내리는 브리튼을 앞두고 무력감을 느낀 순간이 분명 있었다. 스스로와 대등한 위치에 천하의 날고 긴다는 군웅을 앉혀 원탁을 꾸렸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도 깊었다. 한때는 아르토리아 자신도 왕은 틀림없이 강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했는가? 제아무리 용인庸人의 사고방식을 탈각했다 한들 그녀의 혼백은 한 소녀의 육신에 담겨 있는 처지를 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할 때가 찾아오기도 했고, 실존적인 멸망을 목도하면서도 그저 관념적으로만 간곡한 소원을 품는 것이 전부였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작금의 아르토리아는 더는 스스로의 한계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군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긴 후로 철저하게 운용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며 할 말을 어느 정도 가다듬었는지 그녀가 다시 운을 떼었다.
"왕은 때로 고작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자체로 존재의의이자 역할의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게임의 판도에 방향성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 말인즉슨, 주인으로서 내 편을 앞장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정녕 뿌리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의아해하며 눈썹을 들어 올리는 카메론의 얼굴을 마주하는 아르토리아는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음이 스스로의 오랜 이상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눈빛에서 자신이 거쳐 왔던 전철은 밟지 아니할 것 같은 낌새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용안에 화색을 띤 기사왕은 제 앞의 소년에게 넌지시 조언을 건넸다.
"오프닝은 책처럼, 미들 게임은 마술사처럼, 엔드 게임은 기계처럼 하라²는 말이 있죠. 경은 대국을 처음부터 끝까지 엔드 게임처럼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루한 방식을 택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높게 사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주인이란 스스로가 기계적으로 강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책무 하나를 등에 진 사람입니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의 도움을 합당히 받으며 집단을 경영하는 것, 그것이 왕이 마땅히 누리고 또 다루어야 할 가치입니다."
푸르고 붉은 시선 두 개가 서로 맞닿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녀의 조언 안에 제 심금을 울리는 말이 있었음을 방증하듯 카메론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그 정적을 깬 것은 또다시 아르토리아였다.
"체크메이트."
"이런……!"
카메론이 탄식했다. 그는 다시 한번 흑의 주인을,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실패했다. 그는 얼마 전의 임무에서 제 서번트를 지키겠다고 전열로 뛰쳐나갔다가 큰 부상을 입었던 사건을 회상했다. 서번트의 육신이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도 있었을 공격을 독단적으로 받아 내는 바람에 칼데아의 모두가 그의 상태를 한동안 염려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그는 그것만이 모범적인 마스터의 태도이리라고 굳게 믿었다. 끝없이 강해져 모두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만이 주인 된 자라는 생각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카메론은 란슬롯을 지키기는커녕, 란슬롯이 의식을 잃은 그를 안고 돌아왔다고 했다. 모든 것을 떠안으려고 했던 두 손에는 결국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카메론은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또 자존심이 상하고 미안해서 강한 마스터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기사왕의 훈계를 들은 지금은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그 식견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카메론은 여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일어서 복기 대신 깔끔한 인사와 함께 판을 정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폐하. 승리를 축하드리며, 모쪼록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카메론 경."
아르토리아는 목례로 카페테리아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환송했다. 고개를 들면서는 경이라면 필시 잘할 수 있으리라는 진심과 믿음 어린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공간에 혼자 남았을 때, 그녀는 스스로의 곁을 지키고 또 떠났던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소리 없이 입에 한 명 한 명 올려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의 운용은 어떠했는가. 그들에게 내어 맡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저 어린 기사의 용맹한 태도와도 같이 내가 직접 나섰어야 하는 부분이 더 있던 건 아닐까.
카메론은 한바탕 체스 대결을 마치고 나서야 느지막이 개인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정자세로 걸터앉아 잠시 숨을 돌리던 카메론은 부츠를 가지런히 벗어 침대맡에 내려 두었다. 잇따라 특수 섬유로 만들어진 양말을 벗겨내자 왼발등에 각인과 서로 얽히듯 떠오른 영주의 형상이 눈에 띄었다.
한때 아르모리카 근교 사브레블랑 영주의 외아들로서 마땅히 영주의 자리를 자신의 미래로 그리던 그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거대한 이변 끝에, 그는 봉건제 자체가 붕괴된 먼 훗날의 땅을 밟고 한 명의 마스터로 서 있게 되었다. 마스터란 생득적인 지위가 아니다. 영주의 아들로 난 자가 차대 영주 자리에 앉듯 핏줄의 섭리로 결정되는 사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택, 또는 누군가의 신망 따위를 토대로 쓰게 되는 감투도 있기 마련이다. 마스터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카메론은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태어나며 가지고 있던 것을 잃은 대신 선택에 의해 부여되는 주인의 지위를 가졌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영주를 목표하던 시절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가지고 출생했건 중간에 취득했건, 타인을 이끄는 자의 지위란 어느 쪽이건 가릴 것 없이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요함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외려 예보다 지금에 이르러 더 크게 주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그로서는 바삐 일하면서도 마스터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돌아앉자 침대 한구석에 놓인 《손자병법》이 손끝에 걸렸다. 카메론의 공부의 일환이라면 일환이었다. 카메론은 책등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책을 집어 들었다. 항상 저를 지켜 주겠노라 장담하던 제 서번트의 면판 하며 음성이 눈과 귀에 한참을 밟히던 차였다. 이에 그는 오히려 서번트인 그이를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에 저를 지켜 주지 않아도 된다며 불경한 의중으로 임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는 것으로 응수하곤 했다. 그이가 자신을 어디까지나 소년이자 무명 기사로 대하기 때문에 그리한다고 오해했으며, 그 자신으로서도 주인이라면 응당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에도 또 그 말을 듣는다면, 그때도 그렇게 나오는 것이 옳을까? 카메론은 체스판 위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떠올렸다. 킹은 한 칸밖에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이동할 수 있고,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는 중요한 기물이다. 오늘에 이르러 나의 종복, 즉 서번트가 된 호수의 기사는 오히려 나를 섬겨야 할 왕과 같이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말했던 것일까?
서툰 손길로 환의한 파자마 차림의 카메론은 《손자병법》을 개인실의 협소한 서가에 돌려놓았다. 영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것도 거두고 침대에 마침내 몸을 누였다. 그리고 눈을 꼭 감았다. 내 사람이 한층 성장한 내 태도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어린 마음에 바라며 그는 서둘러 잠을 청했다. 지금만큼은 꿈에서라도 그이를 만나 경께 모든 것을 맡기겠노라고 또 한 번의 서임식처럼 선언하고파 견딜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한 만큼, 그리고 꼬박 이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만큼 그는 기사왕의 가르침을 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깊고 달콤한 잠에 빠졌다.
¹ 《손자병법》 中
² "Play the opening like a book, the middle game like a magician, and the endgame like a machine." ― R. Spielmann